뒷골목인터넷세상, 재수시절부터 시작된 서울생활을 다음주 월요일부로 접게 되었습니다. 근 20년간의 서울생활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대구사투리를 내몸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이제 곧 아이 아빠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번째는 뛰어난(?) 서울문화를 이미 접했기에 낙향해서 과연 견딜 수 있을까입니다.

대구 촌놈이 서울물을 진탕 들이켔습니다. 이십년전 서울행 새마을호 안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등학교 겨울방학, 독하게 공부해 보자며 택한 '진성학원'이라는 스파르타식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서울땅으로 향했습니다. 두려움반 기대반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찰라 찻칸에서 간사스런 외국어가 들려옵니다. 평생 TV를 제외하곤 '서울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 그시절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기억엔 대전역을 지나고 부터인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사용하면 마치 상냥하고 애교스러우며 낭낭하게만 들렸던 그 환상의 서울말을 남자들도 사용하더군요. 닭살이 돋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던 저에게 누가 말이나 걸어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습니다. '사투리'가 들통날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재수 전기도 낙방, 결국 후기 이차로 원하지 않던 학교와 과에 들어갔습니다. 화염병이 난무하던 시절이 아니었지만 나름 등투도 있었고 거리항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고 있던 진실과 이상은 현실과 너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과대도 해보구 써클활동도 해보며 남들 다간다는 영어해외연수도 다녀오고 대학내 영어연수프로그램도 운영해보면서 고만고만한 대학생활을 좀먹다 졸업했습니다. IMF시기 사회는 실직자로 넘쳐났었습니다. 결국, 요즘 학생들이 탈출구로 대학원생활을 하듯, 저는 무역협회 국제비지니스 전문가 과정을 수료하며 버팅겼습니다. 스스로 돌아본 자신의 능력이 가당치 않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료전 동문회장상도 받았고, 그렇게 조그만 반도체 회사에 취직하였습니다.

사년 여를 해외업무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강남에서 살던 집도 강북으로 이사했지요. 출근 이튿날부터 수십명의 해외에서 석박사를 따고온 삼성전자 연구진들 앞에서 영어프리젠테이션 및 통역을 맡았습니다. 잘났다는게 아니라, 사회란게 이런거라는 걸 표현하고 싶은 겝니다. 나름 대리직급을 달고 편안해질 무렵, 김대중정부가 푸시했던 코스닥열풍이 회사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인이 되신 창업주의 유학파 아드님이 사장직을 맡았습니다만, 해외에서 생활과 실제 경영이 만족스럽지 못했나 봅니다. 눈깜짝할 사이 회사는 코스닥사냥꾼에게 팔렸고 사장은 회사를 정리한 수백억의 돈을 챙겨 떠났습니다. 그당시 들렸던 이야기로는 땅부자, 집부자인 사장은 마눌님과 어머니를 모시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다네요. 어쨌던 이러한 꼴이 보기 싫어 저는 중국유학 겸 해외거래선 파악을 위해 사직서를 내고 중국으로 1년여를 떠났습니다. 이 회사는 코스닥열풍이 식자 투자처들에게 고소당하며 현재는 회사정리중인 상태입니다.

중국에서 현재 회사의 사장님에게 스카웃제의를 받았습니다. 무역회사 설립부터 현재 운영중인 모든 대리점계약업무가 제손에서 이뤄졌죠. 세계유수기업인 GE의 대리점권 (Authorized distributor)을 얻게 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년에 수십차례의 해외출장, 마케팅, 그리고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좀더 작은 규모의 회사였기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반복되는 무역인의 생활에 염증이 났었습니다만, 2007년 대선이후로 블로거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저의 삶과 인생, 그리고 철학을 1인 미디어 세계, 블로그에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정갈하며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들로만 블로그를 운영하고 싶었습니다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더군요. '시사와 한국정치'에 눈을 뜨게 되면서 알게된 사회부조리 그리고 기득권세력의 욕망은 잠재해 있던 '뒷골목인터넷세상'의 정의감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습니다. 교육자 집안에서 평범하지만 남부럽지 않게 자라온 제가 이토록 날선 글들을 토해낼지 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통쾌하게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 하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곡된 사람들의 이기심 앞에 다시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대한민국 문화의 중심지 수도 서울에서 이 두눈으로 지켜바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07년 대선에 수도권 시민들은 '진실'을 버리고 '욕망'을 택했습니다. 깡촌의 무지렁이들도 아닌, 수도 서울의 시민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진실'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시대를 선도하는 문화의 중심지, 수도 서울의 모습은 별반 다름이 없음을 뼈아프게 느꼈습니다. 결국, 돈에 눈이 멀어 '경제만 살리면 되지'를 남발하는 정치꾼에게 그들의 신성한 표를 의탁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현실이 여러분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지요.

제 인생의 반이상을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특히,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황금기인 20대에서 30대후반의 전부를 보냈습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벌써 서울말 쓰나?'라며 핀잔당하고 서울 친구들을 만나면 '날씨가 살살하다 함 해봐라'라며 제 사투리를 놀릴 때가 생각납니다. 세월은 흘러 흘러 2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철없던 소년의 티를 벗고 어느덧 중년의 아저씨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마, 대구로 낙향후 조그만 해외대리점으로 사업을 시작하겠지요.(필자주 : 아직 향후계획이 100%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마눌님이 고향 부산에서 출산후 몸을 풀고 나면 다시 서울의 모회사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도 있어 '완전 낙향'인지 잠시 휴가인지 불분명하나 현재 상황은 분명 모든 상황을 접고 '낙향'하는 것이 맞습니다, 나중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구 비난하지 말아주십시요.ㅋㅋㅋ)

서울에서 대학생활할 동안, 남모를 자부심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라는 속담처럼 뭔가 알량한 자만감이 생긴것 같습니다. 서울집 20평을 팔면 고향집 50평은 너끈히 사고도 남을 만큼 경제적 우월감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지방 촌사람들과는 다른 높은 문화의식수준도 자랑거리라 여긴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죽어라 싸우며 비난할 때는 은근히 비웃음을 날린 적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울사람들이 보기엔 지지리도 못사는 지방사람들의 싸움박질이 웃기게 보입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살아오면서 받은 단하나 특별한 혜택은 '다양성'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수백평 호화빌라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고 전국팔도 방방곡곡에서 상경한 사람들도 모두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삶의 터전이 이미 서울이 되어버리신 분들이 대다수이겠지만, 뿌리깊은 애향문화에 왜곡된 사상을 가진 분들도 적잖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접하며 다양한 사고를 읽고 배우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울입니다.

처음 낙향을 계획했을 때 가장 큰 걱정은 왜곡되고 세뇌된 고향민들의 '묻지마 정치사랑'이었습니다. 원래 한 성격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는 사람이어서 심지어 가족간에도 '정치'문제만 나오면 일일히 설명하여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며 가족간 불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故 노무현 대통령서거' 이후 고향인들의 생각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적절한 비판' 앞에서는 '철저한 세뇌'조차 이겨낼 재간이 없는 것이겠지요.

두서없이 이십여년 서울인생을 갈겨 쓰다보니 문장과 문맥이 많이 엉성합니다. 낙향뒤에도 제 블로그를 관심있게 지켜봐 주시길 바라며, 경상도지역 정치문화1번지 대구에서 진정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뒷골목인터넷세상'은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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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Z(Backstreet Internet Zealot) World 썩어빠진 뒷골목인터넷세상에서 나의 포스팅이 필요 없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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